문득 '코로나19' 발생 직전에 다녀온 군산여행이 떠올랐다.
기차여행은 처음이라 엄청 설렜던 기억이 난다. 뚜벅이 여행이라 고생은 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몇시간을 달린 후 군산역에 도착했다. 몇몇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 났고 나는 어색하지 않게 그 무리에 섞여 기차역을 빠져나왔다. 외딴 곳에 자리잡은 역전은 그야말로 텅빈 광장같았다. 미리 지도를 보고 예습한대로 넓은 들판을 지나 제방이 쭉 연결된 바닷가에 도착했다.
사진을 보니 깨달았지만 군산에 도착했을 때는 바닷물이 다 빠진 썰물때였다. 지난 2년남짓 내 기억속에 군산의 첫인상은 새파란 바닷물이 잔잔히 파도치던 화창한 오전이었다. 어디서부터 기억의 오류였는지 몰라도 그 당시 내가 꽤나 행복했던 것같다.
걸음이 빠른것도 아닌데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철길마을, 오래되서 이젠 기차가 지날수 없는 쇳가락 위를 사람들이 드나든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나마 가장 붐비는 곳은 옛날 교복을 대여하는 사진관이다.
이곳 경암동 철길마을은 1944년에 신문 용지 재료를 실어나르기 위해 준공하였고 페이퍼 코리아 공장과 군산역을 연결하는 철로였다고 한다. 광복 1년전 이 철도가 실어 나른 종이위에 과연 어떤 글들이 채워졌을까?
녹슨 쇠줄은 아직 이어져있었지만 줄지어 있던 상점이 끝나는 자리에 세워진 팻말로 철길마을은 끝이났다. 이 순조로운 여정에 문제생긴것은 이때쯤이었다. 생각보다 긴거리를 걸어서야 다음 목적지가 나타났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담벼락에 씌여진 한마디,
"이 곳은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지가 아닙니다."
분명 간판에 '초원사진관' 이라고 되어있는데 이곳이 아니라니...
급히 스마트폰으로 검색하기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결론에 도달했다.
'동명이인 아니 동명이-사진관-이다.'
이제와서 보니 친절하게 알려주는 글들이 보인다.
- 이름 같은곳 있으니 주의요망 -
맥이 빠졌지만 서둘러 다음목적지로 향했다.
오후가 되서 도착한 곳은 잘 가꿔진 일본식 정원이 있는 팬션이었다. 말이 팬션이지 「미스터션샤인」에 나올법한 건축물이었다.
일제강점기 월명동에 조성된 일본식 가옥을 복원한 건물로 나라를 잃고 서러웠던 시대의 아픔을 되새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여미랑’[悆(잊을 여), 未(아닐 미), 廊(사랑채 랑)]은 아픈 역사를 잊지말고 하룻밤 묵으면서 만든 추억도 함께 잊지 말자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 건물을 시작으로 곳곳에 일본식 가옥들이 눈에 띈다.
그중 하나가 히로쓰 가옥이다.
일제강점기 군산지역의 포목상으로 부를 쌓았던 일본인 히로쓰가 건축한 일본식 목조가옥으로 건물 2채가 있고 두 건물 사이에 있는 일본식 정원에는 큼직한 석등이 놓여 있다. 군산의 가옥 밀집지인 신흥동 지역의 대규모 일식 주택의 특성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히로쓰 가옥이 그 중 하나라고 한다. 그래서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이제 보니 석등이 보이는 다다미방에서 고니가 화투를 배우던 장면이 떠오른다.
일본식 정원의 화려함에 질려 갈때쯤 주변에 있던 다른 목적지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초원사진관이 보인다. 평일인 탓일까 입구쪽이나 안쪽에도 방문자가 겨우 서너덧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덕에 활짝 열린 문안에서 당장이라도 하얀셔츠에 머리띠를 한 심은하가 나올것만 같았다. 나는 분명 「텔미썸씽」을 봤는데 어째서 머릿속엔 「8월의 크리스마스」 잔상만이 남았을까? 이쯤되면 내 기억을 주관하는 뭔가가 나 몰래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물론 「8월의 크리스마스」가 해피엔딩이라는건... 잠깐... 아직 안본 사람을 위해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다.
사진관을 나와 일본식 주택이 아닌 일반주택으로된 골목을 걸었다.
사실 군산은 나의 고향이다. 정확히는 출생지다. 이곳에서 태어나 몇개월 지내다 수원으로 간뒤 이때 방문한것이니 나에게 군산이란 그저 낯선 도시일 뿐이다.
낯선것이 당연한 이곳 군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발길이 닿는 곳마다 감탄이 흘러 나온다.
미색으로 칠해진 높이가 낮은 건물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간간히 오래된 주택들 벽위로 10월의 담쟁이 넝쿨이 노을에 물들어 있는데다 널찍한 골목에는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외엔 따뜻한 햇살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알고 살았던 곳 중에 이보다 나의 취향에 정확히 들어 맞는 곳이 또 있었을까? 나는 곧바로 삼각대를 세우고 담쟁이 넝쿨 아래서 한참 사진찍기에 열중했다. 우스운건 방금전까지 있었던 일본식가옥에서 찍은 사진보다 이 담쟁이 넝쿨 아래서 찍은 사진이 더 마음에 들었다는 거다.
사진 속 노을이 좀더 붉어 졌다는걸 알아챘을 때 나는 사진 찍기를 멈추고 서둘러 옛군산세관으로 향했다. 제법 높은 건물들이 나타나고 4차선 도로를 건너자 옛 군산세관 건물이 나타났다.
대한제국(순종 2년 6월) 시절 만들어진 옛군산세관은 불란서 사람 혹은 독일 사람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붉은 벽돌과 건축자재를 수입하여 건축했다는 말이 전해진다고 한다. 그렇기에 이 건물은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히며 곳곳에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 일본 건축의 특징이 나타나 마치 일제강점기 경성 한복판에 서있는 느낌을 받게된다.
이렇게 나의 군산여행은 옛군산세관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몸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지난 가을 처음만난 조용하고 친숙한 나의 고향
언제 이곳을 다시 찾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우리의 모습이 바뀌어도 따스했던 첫인상은 변하지 않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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